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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님, 월간 조선 인터뷰, 백세 철학가 신년 메시지

좋은날행복한날 2024. 12. 2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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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철학가 김형석의 신년 메시지

“두렵다는 생각은 없는데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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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인터뷰

백세 철학가 김형석의 신년 메시지

“두렵다는 생각은 없는데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인 것 같아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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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0이 되니까 ‘내가 늙었나?’ 하는 생각도 좀 해보는데 일 때문에 그냥 지나쳤거든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건 90이 됐을 때였어요.
이런 생각을 왜 했냐 하면, 다 없으니까. 나만 남았으니까.
주어진 일만 다 마무리하면 끝나겠지 했는데 일이 계속 있으니까 지금까지 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늙지 말자! 하던 일을 하는 사람은 늙었다는 척을 할 필요 없다!”


⊙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악”
⊙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게 되면, 너무 지적(知的)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 “‘열린 진보’ ‘열린 보수’가 돼서 ‘열린 사회’로 가자”
⊙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은 나하고 윤동주하고 둘이었어요”
⊙ “나라 사랑하는 것은 버림받지 않는데, 자기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버림받는 것 같아요”
⊙ “갈등·경쟁 없는 사회의 민족은 망해”
사진=조선DB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인생의 의미와 삶의 지혜를 전하는 스승이 있다. 105세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지금도 한 해 200회 이상의 강연과 인터뷰, 신문 칼럼으로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신(神)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지만 악마는 우리를 유혹한다는 말이 있다. 유혹 대신 선생은 시련과 고생을 안고 살아왔다.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 시절을 보냈고, 신사 참배 거부로 학교를 자퇴한 적도 있다. 건강이 나빠 실의에 빠졌던 어린 시절, 일본 군대에 끌려가는 학도병 문제로 절망에 휩싸인 청년 시절도 보냈다. 자유를 위해 38선을 넘었고, 셋방이 없어 아는 사람의 문간방에 머물던 기억도 있다. 6·25 전쟁과 4·19 혁명의 모진 고비를 넘기도 했고 민주화 운동이 뜨겁던 시절, 제자들 때문에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대한민국 건국(建國)과 더불어 역사의 수레바퀴를 묵묵히 견디며 살다 보니 이런 말까지 듣게 되었다.
 
  “오래 사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 교수는 이렇게 화답한다.
 
  “고생이 없었다면 제가 없었고, ‘사랑 있는’ 고생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주면 눈물겨울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 우리를 위한 고생이었죠.”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가결 하루 전인 12월 13일 서울 홍제동에서 세상을 일깨우는 백세의 지성(知性)을 만났다.
 
 
  “1년이 옛날 10년같이 느껴지니까”
 
2024년 5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광화문에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김형석, 백 년의 지혜》 출간 기자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한 해 바람이 있다면 얘기해 주십시오. 바라시는 꿈이랄까 이루고 싶은 소망이라 할까요?
 
  “젊었을 때는 이제 먼 앞날이 있으니까 무슨 계획을 세우면 5년, 10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나이가 지나치게 많으니까 1년, 1년의 계획을 세우게 돼요. 하여튼 1년이 옛날 10년같이 느껴지니까.”
 
  ― 그 말씀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지금까지 해오는 일을 그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대로 한 해 더 채워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제 강연하는 거(것), 뭐 방송하는 거, 글 쓰는 거, 과거에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지만 좀 더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고 1년 더 연장했으면 좋겠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내가) 큰 희망을 가진 것 같은데 그런 건 없고요.”
 
  선생의 말이 ‘카르페디엠(Carpe Diem)’을 떠올리게 했다.
 
  ― 2024년에도 책을 여러 권 내셨죠?
 
  “예, 이상하게도 90을 넘기면서는 거의 1년에 한 권씩 책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 가운데 일부는 과거 것을 새롭게 정리한 것도 있고, 또 내가 새로 쓴 것도 있고, 어쨌든 해마다 한 권씩은 나왔으니까, 새해에도 한 권은 나오게 되지 않을까?”
 
  ― 점점 책에 깊이가 더해지고 울림이 커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는지요?
 
  “두 가지 같은데 나 자신을 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게 되면 생활 공간, 일의 공간이 좁아지거든요.”
 
  ― 그렇습니다.
 
  “근데 나는 내가 노력한 것도 있지마는, 또 사회 반응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마는, 활동 공간이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요. 더 올라가지는 않고….”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의 조치(上智)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1947년 3·8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했다. 무일푼으로 내려와 부양가족 11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서울중앙중고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 양성에 힘썼다. 미국 시카고대, 하버드대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피천득 선생의 뒤를 이어 수필계를 대표하는 저자로 한 해 6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악이다”
 
  ― 요즘 뉴스 보기는 어떠신지요? 힘들지 않으신가요? 대통령 탄핵이니 하야니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신문 보기가 두렵다는 분들이 많아서요. 어떠신가요?
 
  “그런(두렵다는) 생각은 없는데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인 것 같아요.”
 
  이 대목에서 기자는 갑자기, 콱 가슴이 메였다.
 
  “아무래도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인데… 두 가지 때문에 그런데, 하나는 문재인 정부가 시작할 때부터 이어져온 것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게 되면, 너무 지적(知的)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에… 그 연장에서 ‘안 되겠다’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말하면 ‘지도자의 무지(無知)는 사회악(社會惡)이다!’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악인데, 지도자가 알아야 할 걸 모르면, 그 사람 때문에 사회가 피해를 받거든요. 그런데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법조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법조계 출신이 정치를 손쉽게 시작하는 경향이 있지요..
 
  “이상하게 그렇게 됐어요. 법조계 사람들이 유능하고, 장래성도 있고 그런데, 솔직히 평하면 육법(六法)이라고 할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법을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우수하다고 봐요.”
 
  ― 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사고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말이죠. 단점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사법고시를 합격하고서는 외부에 나가보는 길이 없어요. (공직에) 임관되어 살다 보니 국제 감각을 몰라요. 내 가족 중에 판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고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이나 독일에 가서 공부하고 있었던 내 다른 가족하고 비교해 보면 많이 좁아요.”
 
  ― 그런 차이가 있겠군요.
 
  “또 하나 어려운 것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자라기 시작한 운동권 학생들이 문재인 정부 때는 일선에서 일하게 됐고, 특별히 청와대에서 일하게 됐거든요. 그 운동권 출신들이 공부도 안 했어요.”
 
  ― 아… 그걸 느끼셨군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무언가 조금 알면 큰 것을 아는 것같이 생각해요. 한번은 운동권 제자가 찾아와 하는 말이 ‘왜 교수님들은 우리 학생들만큼도 나라 걱정을 안 하느냐?’고 해요.
 
  내가 말하길, ‘교수들도 젊었을 때는 나라 걱정을 했는데, 항상 걱정만 하고 있으면 나라가 자라지 못하니까, 지금은 성장하는 기간’이라고, ‘당신네들, 이제 빨리 (학생운동을) 끝내고, 성장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법학과에 입학한 어린 학생이 나한테 와서 ‘선생님, 이번 학기에 헤겔 철학 강의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요. 내가 ‘우리 철학과에서도 3~4학년 학생이 듣지 2학년 학생은 못 듣는다’고, ‘너무 어렵기 때문에 들을 필요 없다’고 해도, ‘학점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요.
 
  ‘왜 그걸 원하느냐’ 그랬더니 ‘동아리 모임에서 카를 마르크스를 알려면 헤겔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듣고 싶다’는 겁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헤겔 이름 하나쯤 알게 되면 대단한 것같이…. 반면, 기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국제적으로 다니니까 좀 괜찮은데….”
 
 
  ‘열린 진보’ ‘열린 보수’가 돼서 ‘열린 사회’로 가자!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4월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형석 교수와 오찬을 함께한 뒤 환담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뉴시스
  ― 그리고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 중에 두 번째 문제는 뭔가요?
 
  “두 번째 문제는 20세기 후반까지 전 세계가 좌우(左右)로 나뉘어 좌가 남으면 우는 없어지고, 우가 남으면 좌는 사라지고, 둘 가운데 하나만 남는 것으로 알았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모스크바냐 워싱턴이냐’였거든요.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선진국가에서 좌는 진보가 되고 우는 보수가 돼서 서로 공존(共存)하는 거다!”
 
  ― 좌와 우가 서로 공존하는 사회!
 
  “함께하는 거(것)! 20세기 후반에 (공존이) 상식이 돼서 모든 선진국가는 보수냐, 진보냐를 나누지, 좌우 중에서 하나만 택하는 건 북한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었거든요.
 
  우리 안에 있던 ‘진보’하고 북한에서 들어온 ‘좌’하고 합해서 나타난 게 운동권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북한은 이미 병든 사회니까 하나(좌)를 넘는 사회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는 ‘열린 진보’ ‘열린 보수’가 돼서 ‘열린 사회’로 가자!
 
  지금 선진국은 다 그쪽으로 간다고요. 그런데 북한은 완전히 후진국이 되었고, 중국과 러시아는 중간에 있고, 우리는 선진국으로 올라갔으니까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열린 사회’로 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국민이 모르면 용서받을 수 있는데 지도자가 모르면 큰일이거든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지금 이제 여당, 야당의 대표자도 말이요, 그분들 생각을 가지고서는 앞으로 좀 더 고생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어요. 예를 들어 민주당은…, 미안합니다만, 민주당 대표 가운데 쭉 보면 ‘아, 저 사람이면 내가 믿을 만하다’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 여당은, 국민의힘은 제대로 정당 구실도 못 하지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극복하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김형석 선생을 만난 날은 탄핵 표결 하루 전날이었다.
 
  ― 지금 탄핵을 앞둔 대통령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대통령이 법조계 출신이고, 그 과정을 쭉 밟았기 때문에 두 가지를 그분한테 생각했는데 먼저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있을 때 쫓겨나지 않았어요? 그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다!’라는 걸 아주 끝까지 지켜줬다는 것! 큰 고마움이죠. 검찰총장으로 있을 때에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하는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된다!’는 세력이 뭉쳐서 대통령으로 뽑아줬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책임이 있고, 또 미래에 어떤 희망이 있다, 하는 것을 충분히 몰랐던 것 같아요. 그분만 몰랐다는 건 아닌데, 그걸 알았으면…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걸 몰랐기에, 이제… 하여튼… 그래서, 내가 얘기한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의 병이 된다’는 말이지요.”
 
 
  경험주의와 관념주의
 
  ― 그 비상계엄령 선포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라셨습니까.
 
  “놀랐죠.”
 
  그러더니 서양 철학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긴 사조(思潮) 강의를 통해 기자는 우리 사회가 계엄령이 몰고 온 불행에 빠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의 말씀은 반짝반짝 빛나는 지혜의 숲에서 나오는 울림 같았다.
 
  “지금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영국의 경험주의 사상에서 생겼어요. 독일 프랑스의 합리주의와 더불어 두 세계관이 르네상스 때부터 나누어져 온 흐름입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합리주의 사회, 관념주의 사회는 어떤 방향과 이념을 먼저 세워놓고 현실을 맞춰가는 거예요. 나쁘게 말하면 땅에 집을 짓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집을 지어 내려오는 거고요, 좋게 말하면 설계도만 있으면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다! 이게 독일 철학이에요.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누구냐? 카를 마르크스예요. 그가 헤겔 철학의 뒤를 이은 것이거든요.
 
  상업의 나라, 영국은 식민지를 개척하며 살다 보니 경험주의를 자연 체득하게 됐는데 지금보다 더 좋은 것, 현재보다 더 좋은 것을 목표와 방향으로 삼게 됩니다.”
 
 
  “토론하고 대화하고 그것밖에 없어요”
 
  ― 그게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 간 차이군요.
 
  “학문이나 철학과 예술은 합리주의가 앞서요. 그러나 정치나 경제는 역시 경험주의로 가야 돼요. 이건(정치와 경제는) 생활이거든요. 영국이 200여 년 동안 경험주의를 굳건히 가지고 오니까 혁명이라든지 뭐 이런 게 없었죠. 그냥 현실에서 현실로 가는 것이거든요. 이제 정치와 경제는 그쪽인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영어문화권이 성장을 못 할 건데, 그 뒤를 계승한 영국의 사상가들이 공리주의자들이에요. 공리주의란 ‘최대 인간의 최대 행복’ 아닙니까.
 
  가장 많은 사람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해 국민 대표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영국이 그렇게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했죠. 다른 나라는 못 했거든요. 경험주의와 공리주의가 더해져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게 나타났거든요.
 
  최대 행복의 방법을 영국에서 찾고 있는데, 영국보다 먼저 미국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죠. 전통에 매달리지 않은 미국에서 새롭게 나타난 게 미국의 실용주의예요. 실용주의 정신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게 목적입니다.
 
  아무리 이론이 좋고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떠들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의미가 없단 말이야.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니까 경험주의 더하기 공리주의 바탕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먼저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셈이거든요.”
 
  ―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가 말한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한에서 진리’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진리는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라 실천과 경험이라는 말이지요?
 
  “그렇지요.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며 실용주의가 뭐냐 하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그게 뭔고 하니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겁니다. 요새 가짜뉴스다 뭐다, 그런 거 다 버리자는 것,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그게 진실입니다. 진실에 입각해 우리 모두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진실을 찾아갈 수 있겠느냐, 해결할 수 있겠냐, 거기서 가장 필요한 건 대화예요, 대화! 대화! 대화하자! 말이지….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만나자고 했다더군요. 우리는 가만히 숨었다가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미국은 대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미국의 장점이야!
 
  대화를 안 하면 나도 널 모르고 너도 날 모르니까 지도자가 못 된단 말이죠. 대화하자! 대화를 통해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대화를 통해 무언가를 찾아가자! 이게 실용주의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의 실용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게 교육입니다. 미국 초등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게 별로 없어요. 토론하고 대화하고 그것밖에 없어요.”
 
 
  “정치는 목적이 아니다”
 
40대 후반인 1979년 11월 무렵의 김형석 교수. 사진=조선DB
  ― 실용주의의 힘은 교육, 토론, 대화, 이 3가지에서 나왔군요.
 
  “이재명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을 비교하게 되잖아요. 어느 쪽이 더 나으냐, 어느 쪽이 더 올바르냐! 손바닥 하나를 가지고 박수를 치면 소리가 안 나요. 윤석열을 내보내는(탄핵) 활동을 먼저 한 건 이재명이에요. 지금 밀리니까 윤석열이 반격(비상계엄)한 것이거든요.
 
  내가 기대하는 건 뭔고 하니, 이 대표나 윤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 ‘내가 잘못했다, 국민을 위해선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잘못했다!’ 그런 게 소망스러운 것이죠. 끝까지 내가 옳다고 하면 건 자유민주주의 지도자가 아니에요.”
 
  ― 잘못을 받아들이고 변화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제일 큰 과오(過誤)를 범하고 있는 게 뭔고 하니 정치가 모든 것을 위하는 목적인 줄 알아요.
 
  정치는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미국에 갔을 때 마운트 버논이라는,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살던 농장에 들렀거든요.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서 물러나 옛집에 오니까 사람들이 찾아와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으니까 ‘대통령께서~’ ‘대통령이~’라고 그랬어요.
 
  조지 워싱턴이 말하길 ‘나는 대통령이 아니고, 그분은 백악관에 계신다. 나를 농민으로 불러달라’고 했어요. 이게 자유민주주의거든요.
 
  정치는 국민을 위해 주어진 일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국민 행복과 교육, 그리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는 게 목적이에요. 정치는 그걸 위한 과정이고 말이죠. 정치가 목적이 되니까 정권을 잡아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인데 여야가 지금 다 거기에 빠져 있거든요.”
 
  ― 여든 야든 권력을 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깨달으면 민주주의가 되는 거고요. 그걸 깨닫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안 되는 거죠.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게 뭔고 하니 정권욕의 노예가 됐다는 겁니다.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뉴스를 보니까 이재명씨가 뭐라고 얘기를 했던데요. 그럴듯하게요.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거든요. 말은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고, 안에서는 정권을 (갖길) 원했어요. 안 돼요. 누구를 위한 정권! 그건 독재죠.
 
  누구를 위한 정치는 없다! 정권을 위한 정치는 잘못입니다! 국민을 위한 정부로 돌아가자! 그걸 올바로 받아들이면 자유민주주의는 올바른 길로 가는 겁니다.”
 
  105세의 연세에도 이렇게 느낌표가 많은 문장을 연타로 날리는 모습에 감탄했고, 게다가 한 번도 숨이 찬 모습이 아닌 것에 더 감탄했다.
 
 
  ‘윤동주·황순원같이 나도 그 방향으로 가겠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 시인, 황순원(黃順元·1915~2000년)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을 만난 뒤 ‘시인과 소설가로 인생을 끝내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을 통해 ‘내가 철학을 공부하며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에 또 새로운 인생이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안한 얘기인데요, 내가 25세 될 때까지 일제 시대에서 살았거든요. 중·고등학교 때 윤동주 시인도 한 반에 있었고 황순원 소설가도 기숙사에서 같이 있으면서 속으로 생각했어요.
 
  ‘저 친구들은 나이 50, 60이 돼도 시인, 소설가로 쭉 살 텐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건가’ 말이죠. (웃음)
 
  그러다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은 나하고 윤동주하고 둘이었어요. 우리가 잘했다고는 생각은 안 하는데 (웃음)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면 되니까 자퇴하고, 나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신사 참배에 반대해서 너무 고생하는 걸 보고서 ‘신사 참배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퇴했거든요.
 
  우리 둘만 자퇴하고 떠났는데 학교에 못 가니까 내 앞날도 답답하고 그랬어요. 도서관에 다니면서 독서를 많이 했어요. 오히려 1년 동안 학교에 다닌 것보다도 나한테는 그 기간이 더 많은 것을 줬어요.”
 
  소년 김형석은 “1년 후에 할 수 없이 신사 참배를 하더라도 학교에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38선을 넘은 이유
 
  “복귀해 보니까 어? 내가 1년 동안 독서한 것이 학교에 안 나온 것과 비교해 손해를 안 봤단 말이죠. 그게 느껴지데요. 난 독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죠.
 
  그리고 학교에 안 가는 1년 동안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서 깨달은 게, 그때 제일 절망에 빠져 있던 때니까 느낀 게 뭔고 하니, ‘철학을 공부해가지고 정신적 지도자가 되자!’ ‘윤동주·황순원같이 나도 그 방향으로 가겠다!’ 그게 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일제 시대에 사니까, 우리 집에 일본 사람이 살고, 우리는 그 옆 오막살이 머슴으로 살고 있었거든요. 그건 아니거든요.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 그래서 그런 절망 속에 희망을 꿈꾸고 있는데 결국 해방이 찾아왔거든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이 되니까, 서재필도 서울로 가고, 이승만도 서울로 가고, 김구도 서울로 갔는데 평양을 통해 서울로 가거나 평양에 온 사람은 김일성 장군밖에 없더군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김일성 장군이 환영회에 떡 나타났는데 보니까 내 초등학교 선배거든요. 이름이 김성주! 그(김성주) 할아버지는 내가 잘 알고, 사촌들은 내가 가르쳤고.
 
  해방이 되고 얼마 안 있다가 고향에 왔을 때, 우리 동네 어른들하고 몇 사람이 조반을 같이 먹었거든요. 다른 분들은 다 어른이고, 김성주하고 나는 8년 차이는 있지만, 우린 젊은 층이었거든요. 그때 누가 김성주를 보고서 ‘해방이 됐는데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돼야 하겠냐’고 물으니, 그가 ‘첫째는 친일파 숙청이고, 두 번째는 전 국토를 나라가 소유하는 것이고, 산업 시설 전부, 공장이나 회사를 나라가 가지고 개인은 없고, 경제 활동 역시 나라가 하지 개인은 못 한다! 지주는 추방한다’는 얘기를 쭉 해요. 속으로 느꼈어요. ‘아, 저 사람은 사상이 없는 사람인데, 철저한 공산당원, 그것도 행동파구나….’
 
  해방 후 2년 동안 살면서 얻은 게 뭔고 하니, 내 나라는 나라다운 나라다! 나라다운 나라! 그래서 38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길이 뭔가를 고민했어요. 교육계에서 제자들을 키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했지요.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제자들을 키웠거든요.”
 
 
  내 나라는 나라다운 나라다! 나라다운 나라!
 
2021년 9월 11일 김형석 교수의 모습이다. 인천 을왕리 해변 근처 집필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었다. 사진=조선DB
  선생은 “6·25 전쟁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찾았다”고 했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뭔지도 모르면서 자유민주주의는 확고해졌어요. 미국이 도와줬거든요. 유엔이 도와줬거든요. 우린 그들과 더불어 살아남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뭔지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자유민주주의였어요. 그때부터 자유민주주의는 고속도로와 같이 주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승만 박사가 그 업적을 남긴 거죠, 독재는 했지만.
 
  후진 국가가 다 그렇고 신생 국가도 그렇고, 이건 내 생각이지만, 공산 국가도 다 똑같은 게 하나 있는데 뭔고 하니 나라가 시작할 때는 독재 정권이에요. 우리도 그걸 겪었거든요. 그리고 그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해서 군사 정권이 됐거든요.
 
  더 답답해졌죠. 오해를 푼 게 뭔고 하니 ‘(박 대통령이) 내가 쿠데타를 일으킨 목적은 반공(反共)이다!’ ‘반공이 국시(國是)’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란 말이죠. 박 대통령이 좌파 사람이기 때문에 제일 장점이 뭔고 하니, 정치의 첫째 목적을 경제로 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 먹고사는 문제에 천착하게 됐다는 말이군요.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니까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걷는 거예요.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를 표방한 자본주의는 다 망한다고 그랬거든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장점이 뭔고 하니, 자본주의 더하기 휴머니즘이에요. 휴머니즘이 인류 역사에 몇천 년 내려왔다는 걸 잊어버린 거야. 공산주의가 왜 실패했나? 곧 무너진다는 자본주의 안에 휴머니즘이 있거든요. 미국은 개척의 땅이었으니 큰 부자가 많이 생겼어요. 왜 부자가 됐냐? 다 같이 잘살기 위해 부자가 됐다 말이지. 소유보다 기여 정신, 그게 휴머니즘이거든요.
 
  세계 역사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안 되게 돼 있으니까, 중국도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이 계속됐으면 달랐겠죠. 그러니까 조금 더 혼란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 자연히 세계가 바뀔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자!
 
  자유민주주의는 대화를 통해 국민의 행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고서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윤 대통령같이 되거든요. 방향은 여기인데 방법은 이쪽을 썼거든. 그러니까 그분… 나는 참 불만스럽지마는 그분에게 더는 기대하는 게 힘들 것 같아. 다음 세대가 오면 되겠죠. 그러나 나는 희망은 있어요.”
 
 
  “한강 작가, 思想을 풍부히 담았으면…”
 
  ― 조기 대선이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지금 이재명 대표에게 제일 걱정하는 게 뭔가 하니, 이 대표는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고 있거든요. 자기 살기 위해 안 갈 길을 가니까 더 어려워졌죠. 국민이 심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분명한 것은 나라 사랑하는 이는 버림받지 않는데, 자기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버림받는 것 같아요.
 
  그걸 포기하고 ‘나는 과거에 이랬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가는 길은 이쪽’이라 말해야 합니다. 또 (민주당이) 국민의힘이 내놓는 정책보다 국가 경제라든지, 국민 복지를 위한 정책을 더 낸다면, 이재명은 다음번 대통령이 될 사람이에요.”
 
  ― 혹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연세대 국문과 89학번)를 수업 시간 만났던 기억이 나나요?
 
  “그저 대학에서 잠깐 만난 것밖에는 없어요. 내 나이 97세 때 세계 출판 전시회가 국내에서 열렸는데 그해 출판문화협회에서 공헌이 큰 업적을 남겼다며 나하고 한강을 뽑았어요. 그때 만난 기억이 있어요.
 
  그의 작품 중에 다른 건 읽지 않았고 《채식주의자》는 읽었죠. 참 고마운 업적이죠. 이건 내 생각인데 몇백 년 역사로 볼 때 남는 것은 사상(思想)이 남아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말이죠.
 
  노벨평화상은 정치성이 있는 것 같지만 문학은 독립된 문화니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참 희망을 주네요. 아직 젊고 말이죠. 앞으로도 작품 쓸 때 사상을 풍부히 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지금 그의 시적(詩的) 표현은 누구도 못 따라가요. 개성도 뚜렷하고 말이죠. 그런데 정치만 이렇게 뒤떨어져가지고 싸우니까 좀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
 
  ― 살아오시면서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언젠가 공군에서 제대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초청받아 무슨 얘기를 좀 했어요. 마지막 결론 같은 얘기를 하면서 무슨 얘기했는가 하니, 아흔이 넘어서 지방 어느 대학에서 상을 좀 받게 됐거든요. 상을 받고서 무슨 소감을 하게 돼서 내가 그랬죠. ‘상을 주니까 받았는데 암만(아무리) 생각해도 상 받을 자격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보면 없어요. 나보다 훌륭한 사람도 많이 있고, 나보다 좋은 업적을 낸 사람도 있고, 빛나는 직책을 맡은 사람도 있고, 난 그저 사회가 요구한 심부름을 한 것밖에는 없는데…, 굳이 상 받을 게 있다 하게 되면, 오래 사는 동안에 고생은 누구보다 많이 했다’고 했어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민주화 투쟁 당시 학생들을 걱정하고, 하여튼 고생은 누구보다 많이 했으니, 시상하는 쪽에서 나에게 상을 ‘오래 사시는 동안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라고 하면 내가 받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상을 받고 나니까 깨닫는 게 두 가지인데, 만약에 그 고생이 나를 위해서 한 고생이었으면 아마 상을 안 줬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 고생이 어떤 때는 내 가족을 위해, 어떤 때는 내 제자들을 위해, 어떤 때는 세상 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어요.
 
  나를 위한 고생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분들을 위한 고생이었기 때문에 행복했다고, 그게 없으면 내 인생이 없으니,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라는 걸 느꼈어요.
 
  고생이 없었다면 내가 없다고, ‘사랑 있는’ 고생이 있어 내가 행복했습니다!
 
  그런 나보고 누군가가 ‘그거(그게) 다 우리를 위한 고생이었죠’라고 말해주면 내가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하거든요. 근데 내가 뭐 훌륭하게 성공했다, 뭐 노력했다, 그건 아니고 그 사랑이 있는 고생, 불가(佛家)에서는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이라 하지만 ‘사랑 있는’ 고생은 고해와 같은 인생이 아니거든요. 그게 행복이거든요.”
 
 
  “90 이전까지는 상(賞)을 한 번도 받아본 일 없어”
 
  그러더니 선생은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오늘 어느 신문을 보다가 느꼈는데 70대 이상 사람들이 모여가지고서 인생을 다시 출발하는 모임을 만든대요.”
 
  ― 아 그래요?
 
  “(웃음) 그 기사를 읽고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웃음)”
 
  ― 이 기사 읽고 당장 허락받으러 올 겁니다.
 
  “내 가까운 친구들에게 조언을 한 가지 했는데 다들 인생을 세 단계로 살게 돼요. 서른까지는 교육받고 살아야 해요. 그러다 직장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는 직장에서 일하고, 정년이 되면 가정으로 돌아오고 그러거든요. 나는 정년을 하며 다시 출발했거든요. 돌이켜보면 대학에 있을 때까지 살았던 내 인생은 강물 속에서 산 것 같아요. 연세대라는 강물 속에서 살았는데 정년퇴직을 하고서 한 20년 동안 사회에 나가 일해 보니까 물고기가 강물에 있다가 바다에 나온 것 같았어요. 더 일이 많고, 더 넓어요. 그래서 만약 누가 나보고, 평생을 사는 동안에 제일 소중한 나이가 몇 살이었느냐 그러면 60에서 80 사이인 것 같아요. 그걸 빼버리면 내 인생이 없거든. 그것 때문에 내가 있거든. 좀 미안한 얘기인데 내가 90 이전까지는 상을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거든요.
 
  심부름만 했으니까…. 90이 넘으니까 그렇게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인생은 70부터다.
 
  미안한 얘기를 하나 더 하면, 불가에서 우리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그러거든요. 태어나기 이전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죽고 난 다음도 내 인생 아니니까, 남는 건 젊게 사는 것이거든요, 건강이거든요, 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거든요.
 
  내가 80이 되니까 ‘내가 늙었나?’ 하는 생각도 좀 해보는데 일 때문에 그냥 지나쳤거든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건 90이 됐을 때였어요. 그런 생각을 왜 했냐 하면, 다 없으니까. 나만 남았으니까. 주어진 일만 다 마무리하면 끝나겠지 했는데 일이 계속 있으니까 지금까지 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늙지 말자! 공부 계속하고 감정적으로 늙지 않고, 정서적으로 늙지 않고, 하던 일을 하는 사람은 늙었다는 척을 할 필요 없다!”
 
  선생이 던진 문장과 미국의 헨리 포드가 남긴 말이 오버랩되어 들렸다. “배움을 멈추는 사람은 스무 살이든 여든 살이든 이미 늙은 것이다. 하지만 배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언제나 젊음을 유지한다.”
 
 
  “갈 길이 하나밖에 없는 그런 길을 찾아가야”
 
2015년 6월 22일 김형석 교수. 그는 당시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별 강연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내가 교수답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조선DB
  ― 원하는 직장이 있는데 내년에 사람을 거의 안 뽑는다고 합니다. 바늘구멍 같은데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나요? 꿈꾸는 사람은 정말 행복할까요. 취업을 못 한 젊은이들에게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보면 젊은 사람 중에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잘못이 우리 기성세대에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지방 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한테 얘기하면서 내가 그랬어요.
 
  체육 선생이 100명의 학생에게 ‘100m를 몇 초 안에 뛰어라. 한 달 동안 열심히 연습한 뒤 1등, 2등, 3등만 남기고 97명은 남지 못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이 실망한단 말이에요. 이런 획일적인 교육 대신에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많은 운동 중에 자기 체질에 맞고 네가 하고 싶은 운동 뭐든지 해라. 그러고 한 달 후에 보자’고 하면 아마도 100명의 학생 모두가 1등이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자기 개성을 찾아가야 해요. 갈 길이 하나밖에 없는 그런 길을 찾아가야 해요.
 
  덧붙여 말하자면 아무 갈등 없고, 경쟁도 없는 사회에 살면 성장을 못 해요. 그 민족은 망한다고….”
 
  ― 맞습니다.
 
  “일본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원주민이나 남태평양 괌의 차모로족 원주민들도 사라지고 있어요. 갈등과 경쟁이 없으니까요. 이기적인 경쟁을 하는 사람은 나도 불행하고 사회도 행복하지 못해요. 내가 살아보니까 한 단계 더 높은 경쟁이 있는데, 그 경쟁이 뭔고 하니 선의(善意)의 경쟁이에요. 사랑하는 경쟁입니다. 후배를 키우고, 나보다 약자를 올려주고, 직장 생활할 때도 나보다 유능한 사람을 올려주고, 나는 그 밑에서 일해도 좋고 말이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남을 섬기는 일이 더 중하지, 남을 지배하는 일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인생 전체를 잃어버리고 만단 말이죠.
 
  그러니까 갈 길은 100가지 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뭐든지 택하라는 것이죠.
 
  무엇이든 나한테 주어진 일이 있으면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라! 내 능력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출발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라, 그게 더 중하다! 언젠가 사관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공무원이나 군인은 계급사회잖아요. 빨리 승진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신 중책을 맡아 끝까지 가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죠. 빨리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빨리 끝나고, 중책을 맡아 늦게 올라간 사람은 끝까지 간다는 강연을 했는데 어느 장군이 회고하길, 젊은 시절 들은 그 강연이 참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놀랍게도 국방장관 지낸 어느 분도 그때 그 강연을 들었다고 해요.”
 
  ― 기적이란 게 있나요? 선생님은 삶에서 기적이란 것을 어떤 때 느끼셨나요?
 
  “종교 문제인데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좀 잘 못 이해해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그건 역사입니다. 성경 구약(舊約)도 창세기에서 욥기까지가 역사고, 그다음에 역사 속의 인물들이 남겼던 사상과 편지 같은 것이고, 신약(新約)도 4대 복음과 사도행전까지 역사적이고, 나머지는 그 역사의 주인공들이 남긴 내용입니다.
 
  왜 이 얘기를 하는고 하니, 기독교 신앙이라는 건 역사 신앙이기 때문에 내 체험, 한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 그 역사 속에서 나를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내가 신앙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주어진 거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14세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버림받은 소년이 되었다고 한다. 가난과 병 때문에 중학교에 갈 희망도 없었다. 철없던 나이였지만 이렇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건강을 주시면,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살게 해주시면 제가 나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다시 중학 1학년 크리스마스 때 ‘앞으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다’는 기도를 하며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가혹하기만 했다. 신사 참배 거부로 자퇴했다가 되돌아와야 했다.
 
  “사람들은 내가 남이 못 하는 걸 하고 그러니 자꾸 기적이라고 그러는데 기독교는 기적이 아니에요.
 
  기적이 아니고 섭리라고!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고 어떤 주어진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한평생 사는 동안에 내가 직장을 구해 가본 길은 한 번밖에 없다고요. 언제나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하고, 그 일을 마치면 다른 일이 생기고, 또 생기고…. 지금도 왜 늦도록 오래 사는가 하면 주어진 일을 끝내기 위해서예요.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의 목표는 주어진 거다!”
 
  ― 주어진 거다!
 
  “그걸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그러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움직였어요.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사람들하고 미국을 떼놓을 수가 없다고. 미국사도 그렇다고. 서양 철학사를 쭉 보게 되면 그 안에 흐름이 있다고요. 그걸 벗어나면 악이 되고, 그걸 따라하면 선이 된다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교훈,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양심으로 판단 못 하는 것을,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사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걸 기적이라고 얘기하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 주어진 섭리 안에서 우리도, 우리 삶도, 우리 《월간조선》 독자도 잘 살겠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소용돌이치는 혼돈 속에서 김형석 선생과 나눈 대담은 기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선생이 신사 참배 관련해서 자퇴를 하고 1년간 집에 있던 청소년 시절에 ‘철학을 공부해가지고 정신적 지도자가 되자!’라는 결심이 진정 열매를 맺은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선생이 전공한 철학 ‘Philosophy’의 어원은 사랑을 의미하는 ‘Philos’와 지혜를 가리키는 ‘Sophia’에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중요한 동기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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